야코포 티에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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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코포 티에폴로는 12세기 말에 태어난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크레타 공작, 콘스탄티노폴리스 포데스타를 역임했으며, 1229년에는 베네치아 도제로 선출되었다. 도제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베네치아 민법을 제정하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 토지를 기증하여 성당 건설을 지원했다. 대외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했으며,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담하여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1249년 퇴위 후 사망하여 산 자니폴로 교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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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티에폴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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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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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베네치아의 도제 |
임기 | 1229년 – 1249년 |
이전 | 피에트로 치아니 |
이후 | 마리노 모로시니 |
직함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데스타 |
임기 | 1218년 – 1220년 1223년 – 1224년 (?) |
직함 | 제1대 크레타 공작 |
임기 | 1209년 – 1214년 |
이후 | 피에트로 Querini |
출생 | 1170년 직전 |
출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사망 | 1249년 7월 19일 (만 세) |
사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배우자 | Maria Storlato (사망: 1240년) 시칠리아의 발드라다 (1242년 결혼, 1249년 7월 19일 사망) |
자녀 | 로렌초, 조반니, 그리고 4명의 다른 자녀 |
2. 초기 생애와 경력
야코포 티에폴로는 12세기 말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문은 무역에 종사했으며, 티에폴로 자신도 1190년에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과 무역하는 상인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1196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의 아비도스에서 선원들의 반란으로 실패한 콘스탄티노플행 상선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상들과는 달리 티에폴로는 베네치아 정치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다.
2. 1. 정치 참여
야코포 티에폴로는 그의 조상들과는 달리 베네치아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1205년, 피에트로 치아니를 베네치아 도제로 선출한 40명의 선거인 중 한 명이었다.[5] 1207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재판관으로 활동했으며, 1209년에는 초대 크레타 공작으로 임명되어 1214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5]1212년 무렵, 야코포는 크레타 공작(이탈리아어: ''duca di Candia'') 직위를 맡았다. 그의 재임 시기에 크레타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배력은 그리스 토착인들의 상당한 도전을 받았다.[5]
1229년 3월 6일, 야코포는 전임 도제 피에트로 치아니가 사퇴한 후 도제에 선출되었다. 선출 당시 야코포와 그의 경쟁 상대 마리노 단돌로가 모두 20표씩을 얻어 교착 상태에 놓였으나, 추첨제를 통해 티에폴로가 승리했다. 이는 단돌로 가문과 티에폴로 가문 사이의 불화를 촉발시킨 것으로 여겨진다.[5] 이후 선거에서 분할 투표가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인 수를 40명에서 41명으로 늘렸다. 또한 티에폴로는 도제의 권력을 극도로 제한하는 전통적인 프로미시오네를 서약했다.[6]
2. 2. 크레타 공작
야코포 티에폴로는 1212년 무렵 크레타 공작(이탈리아어: ''duca di Candia'') 직위를 맡았다. 그의 재임 시기에 크레타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배력은 그리스 토착인들의 상당한 도전을 받았으며, 마르코 1세 사누도의 손에 크레타가 떨어지면서 마침내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곧 베네치아의 함대가 도착하여, 그를 섬에서 몰아내며, 그의 성공은 잠시뿐이었다.[5]티에폴로의 임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보니파시오 1세 델 몬페라토에게서 구매한 크레타 섬에 대한 베네치아 행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티에폴로는 베네치아 식민지 설립을 감독했으며, 본국에서 온 군사 식민지 개척자들을 통해 섬에 정착시켰다. 1211년에는 크레타 섬의 그리스인들이 베네치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제노바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티에폴로는 낙소스 공국의 베네치아 영주인 마르코 1세 사누도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사누도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지만, 처음에는 섬에서 철수하려 하지 않았다. 1213년이 되어서야 티에폴로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사누도를 설득하여 크레타 섬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하게 할 수 있었다.
2. 3. 콘스탄티노폴리스 포데스타
1218년 티에폴로는 라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데스타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현지 베네치아 식민지의 총독이자 베네치아 대표를 의미한다.[1][2] 그는 2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거의 자율적인 대리인처럼 행동했다. 1219년 8월에는 니케아 황제 테오도르 1세 라스카리스와, 1220년 3월에는 이코니움 술탄 카이쿠바드 1세와 베네치아를 대신하여 평화 및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1][2] 그는 데스포테스라는 비잔틴 작위를 취득하고, 도제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되는 "로마 제국의 4분의 1과 절반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 1219년 9월 라틴 황후 욜란다가 사망한 후, 그는 섭정 코농 드 베튠과 함께 제국의 가장 강력한 유력자 중 한 명이었다.[1]1221년 1월, 티에폴로는 로마에서 새롭게 임명된 마테오가 라틴 제국의 베네치아 교회 기관에 대한 관할권을 그라도 총대주교에게 포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1][2] 같은 해 하반기에 티에폴로는 트레비소의 포데스타로 봉사하며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베르톨트와 조약을 체결했다.[1]
1223년 4월, 티에폴로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라틴 제국 내 베네치아 거주자들에게 부과된 일부 교회 제재를 면제받았다.[1][2]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항해하여 다시 베네치아 포데스타로 거주하게 되었다. 1224년 2월 20일, 그는 라틴 황제 로베르 드 쿠르트네와 협정을 체결하여 베네치아인들이 라틴 제국에서 누리던 경제적 특권을 확인했다.[1][2] 그의 임기가 언제 끝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늦어도 1224년 가을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
1227년 봄, 티에폴로는 다시 로마로 사절로 보내졌고, 같은 해 늦게 다시 트레비소의 포데스타가 되었다. 그곳에서의 두 번째 임기는 그의 입법 활동으로 특징지어진다.[1] 1228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는 두칼 평의원이었다.[1]
3. 도제 선출과 재임
야코포 티에폴로는 12세기 말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212년경 크레타 공작(이탈리아어: ''duca di Candia'') 직을 맡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크레타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배력은 그리스 원주민들의 도전을 받았으며, 마르코 1세 사누도에게 크레타가 함락될 뻔했으나 베네치아 함대가 도착하여 이를 막아냈다.[5]
1229년 3월 6일, 전임 도제 피에트로 치아니가 사임한 후 야코포 티에폴로는 도제로 선출되었다. 선거에서 야코포와 그의 경쟁자 마리노 단돌로는 각각 20표를 얻어 동률을 이루었으나, 추첨을 통해 티에폴로가 최종 선출되었다. 이는 단돌로 가문과 티에폴로 가문 사이의 갈등을 촉발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선거인 수를 40명에서 41명으로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5] 티에폴로는 도제 취임 시 그의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적인 프로미시오네를 서약했다.[6]
1249년, 티에폴로는 도제 자리에서 물러나 산폴로의 사유지로 은퇴했다. 안드레아 단돌로의 ''Chronicon Venetum''에 따르면, 그는 1249년 3월 2일 두칼레 궁전을 떠나 7월 19일에 사망했으며, 산 차니폴로에 안장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마리아 스토를라토였고, 1240년 그녀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의 발드라다와 재혼했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로렌초 티에폴로는 1268년부터 1275년까지 도제로 재임했고, 피에트로는 파도바의 포데스타를 역임했다. 발드라다와의 사이에서는 두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들은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어렸고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다.[7]
3. 1. 국내 개혁
야코포 티에폴로는 베네치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1242년에는 다섯 권의 법령서로 구성된 베네치아 민법 ''Statutum novum''을 제정하여 성문화했다. 이는 약 50년 전 엔리코 단돌로가 시작한 법전화 과정을 계승한 것이다.[7] 1234년에는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 토지를 부여하여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산 차니폴로)과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다.[7]3. 2. 대외 정책
야코포 티에폴로는 제4차 십자군 이후 확보한 해상 영토를 보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을 방어하며, 베네치아의 경쟁국인 제노바 공화국과 피사 공화국과의 세력 분할, 그리고 이탈리아 및 지중해 국가들과의 촘촘한 외교 및 상업 조약을 맺는 등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갔다.[5]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1232년 베네치아에서 호의적인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베네치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이탈리아와 지중해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공화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특히 제6차 십자군과 라틴 제국의 오랜 적이었던 그리스의 니케아 제국과의 긴밀한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5] 반대로, 공화국은 교황청과의 분쟁에서 황제를 돕기를 단호히 거부했고, 롬바르드 동맹에도 협력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는 점차 프리드리히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으며, 롬바르드 도시에서 베네치아인들을 포데스타로 임명하여 황제에게 저항하도록 장려했다.[5]
1237년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프리드리히가 동맹을 상대로 승리한 후, 티에폴로의 아들 피에트로 티에폴로가 밀라노 군대를 이끌다가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 이후 베네치아는 제노바와 교황청과 동맹을 맺었다. 베네치아가 바를레타와 살피아 항구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었던 교황의 시칠리아 왕국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에밀리아-로마냐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1240년 페라라를 점령했다.[5] 같은 해, 아풀리아 해안에 대한 베네치아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피에트로 티에폴로의 처형을 명령했다.[5] 베네치아 요원들은 또한 예루살렘 왕국에서 프리드리히의 정책에 반대하려 했으며, 1242년 티에폴로는 반란을 일으킨 이스트라의 풀라를 재정복했다.[5]
풀라를 약탈한 후, 티에폴로는 시칠리아 공주 발드라다 디 시칠리아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티에폴로가 자신의 자녀가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기 위한 계획의 신호로 여겨져 의심을 받았다.[5] 이 의심은 통치 세력의 상당 부분이 티에폴로의 정책과 야망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왔다. 실제로 1245년, 마리노 모로시니, 레니에로 제노, 조반니 다 카날 등 베네치아의 지도적인 귀족 3명은 프리드리히 2세 앞에 잡혀와 끌려가면서 황제의 제1차 리옹 공의회의 파문을 부인했다. 이는 티에폴로의 정책에 대한 명백한 부인이었으며, 베네치아와 프리드리히 간의 공개적인 갈등의 종말을 알렸다.[5]
4. 퇴위와 죽음
1249년에 야코포 티에폴로는 도제 자리에서 물러나 산폴로의 산타아고스티노(Sant' Agostino)에 있는 그의 사유지로 은퇴했다.[7] 안드레아 단돌로의 Chronicon Venetum에 따르면, 그는 3월 2일 두칼레 궁전을 떠나 7월 19일에 사망했다.[7] 그는 산 차니폴로에 묻혔다.[7]
5. 가족 관계
야코포 티에폴로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마리아 스토를라토와 했으며, 1240년에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시칠리아의 발드라다와 하였다.[7]
부인 | 자녀 |
---|---|
마리아 스토를라토 | |
시칠리아의 발드라다 |
참조
[1]
서적
Venice Reconsidered: The History and Civilization of an Italian City-state
[2]
서적
A History of Venice
Penguin Books
[3]
서적
The Dogaressas of Venice: The Wives of the Doges
T. W. Laurie
1910
[4]
서적
Byzantium and Venice: A study in diplomatic and cultural relations
University Press
1988
[5]
서적
Venice Reconsidered: The History and Civilization of an Italian City-state
[6]
서적
A History of Venice
Penguin Books
[7]
서적
The Dogaressas of Venice: The Wives of the Doges
T. W. Laurie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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